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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가볍게 쓰는 에세이...🐾

일단, 나의 이야기 (1)

나는 1995년 광명에서 태어났다. 기억을 되돌리면 당시 광명의 모습은 황토색 필터를 끼운 듯 꽤나 뿌연 느낌이다. 내가 살던 동네는 여섯, 일곱 정도 되는 가구가 있었다. 그게 무슨 동네냐 하겠지만은 어린 시절 나는 그 일곱 남짓한 가구가 낑겨있는 골목을 벗어난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동(洞)의 개념이 아니라, 내 또래 친구들이 모여살던 곳을 곧 나의 동네로 인식했다. 그 좁은 골목은 사람들이 거쳐가는 길이자, 아이들의 놀이터이며, 동시에 외부로 향하는 출입구였다. 어린 아이들은 골목에 모여 축구, 땅따먹기, 얼음땡, 탑블레이드, 장난감 자랑을 하며 놀았다. 근처에는 흙탕물이 흐르는 개울이 하나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 악어가 있다고 믿었다. 나는 내가 가지 못 한 곳, 그러니까 미지의 영역에 대한 모종의 두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집에서는 나를 오냐오냐 키웠다. 90년 대까지만 해도 경기도에는 남아선호사상, 가부장제 등 꼰대 문화가 남아있는 곳이 많았다. 나는 2녀 1남 막내로 태어났다. 할머니는 전통을 끔찍히 아끼는 분이셨고 난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 자세히 하겠다. 큰 누나와는 7살, 작은 누나와는 5살 차이가 났다. 어렸을 때는 작은 누나와 참 많이 싸웠다. 사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싸움보다 일방적인 폭행에 가까웠다. 성장기 때 5살 차이에서 오는 체급을 무시할 수 없었다. 내가 초등학생일 때 작은 누나가 중고등학생이었다고 하면 이해가 될 것이다. 한번은 나도 반항하겠다고 누나 배를 발로 밀어서 넘어뜨렸는데, 바로 누나가 일어나서 *깐돌이로 나의 머리를 때렸다. 그 압도적인 힘에서 오는 공포와 머리에 이는 고통에 이대로 죽는구나 싶었다. 오줌을 싸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이렇게 맞은 이야기를 유쾌하게 할 수 있는 이유가 있다. 난 내 삶을 돌아보며 스스로에 대해 자체적으로 평가를 하곤 하는데, 언제나 ‘맞아도 싸다’라는 결론이 나왔다.
* 깐돌이: 손바닥을 펴고 손가락만 구부려서, 손가락 첫 번째 관절에 있는 뼈로 머리를 때리며 ‘깐돌이’를 외치는 행동. 무슨 행동인지 이해가 안된다면 정상이다. 그맘때쯤에는 이런 이상한 유행이 돌았다.

어린 시절 나는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창의적이고 재기발랄했다. 일반적으로 표현하면 끊임없이 나대고, 예측할 수 없고, 말을 쉬지 않으며, 매를 불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는 오래 가지 않았다. 나에게 사춘기가 찾아왔다. 내가 학교를 다닌 지역만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희한하게 고등학생 때보다 초충등학생 때 학교폭력이 유난히 심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나, 그 당시 1짱, 2짱이라 불리던 놈들이 학급의 남학생 전체를 모아 줄세워놓고 때렸다. 물론 나는 맞는 입장이었다. 그때 1짱은 몇 해가 지나자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사실인지 모르겠으나 소년원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러던 어느 날 중학교 2학년 때 그 1짱이 우리 반으로 다시 들어왔다. 기술가정 시간에 맨 뒤에 앉은 엄석대는 나를 앞자리에 앉게하고 수업시간 내내 내 등을 때렸다. 뻔히 맞는 소리가 울려퍼지는데도 아무도 아는 체 하지 않았다. 며칠 있다 그 놈은 또 사고를 쳤는지 사라졌다. 가장 공포스러운 일주일이었고, 가장 안심이 된 하루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힘도 없는 어린 애들한테 호구처럼 그걸 맞고 있었나 싶지만, 그만큼 나도, 세상도 참 미성숙했던 시절이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겪어본 적 없는 일이라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몰랐다. 맞는 게 당연한 줄 알았다. 세상은 늘 그런식이다. 무지한 사람과 등쳐먹는 사람. 그런 사춘기를 겪었기 때문인지 나는 낯을 많이 가리게 됐다. 고등학생 때는 딱히 눈에 띄지 않게 지냈고, 대학생 때는 비로소 *아싸가 됐다. 
*아싸: 아웃사이더의 줄임말. 집단에 적응하지 못 하고 주변에 맴도는 사람.

지금도 그렇지만, 59년생 아버지와 66년생 어머니는 산업 역군이셨다. 나는 아주 가끔씩 아빠가 일하는 회사와 공장에 놀러가곤 했다. 그곳에는 소위 말해서 ‘기계적’인 것들이 많았다. 쉴새없이 돌아가는 거대한 원통에 하얀 벽지가 하나씩 지날 때마다 새로운 색이 입혀졌다. 망치, 드라이버, 스패너 같은 공구들이 무질서해 보면서도 나름의 운율을 가지며 널브러져 있었고, 신나나 기름 냄새가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었다. 애들이 맡기에 다소 자극적이었을지 모르지만, 난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 투박하고 기계적인 이미지에 매료됐다. 그래서 과학자를 꿈꿨다. 어렸을 때는 공학자나 기술자라는 직업을 몰라서 그냥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아무튼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초등학생 때는 기계과학 동아리에 들어가 납땜을 했고, 고등학생 때는 로봇 동아리에 들어가 코딩을 했다. 

흥미와는 별개로, 학창시절에 난 공부를 잘하는 편은 결코 아니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회나 국사, 영어 등 달달 외우는 과목은 더욱 거부감이 들었다. 그래서 60점 이상 맞아본 적이 없었다. 반대로 원리를 설명해주는 과학과 수학은 너무 재밌었다. 모든 물질은 알갱이로 되어 있어서, 빽빽하게 달라붙으면 고체, 느슨하게 흘러다니면 액체, 막 날뛰면 기체다. 그래서 같은 알갱이 개수라면, 고체에서 액체, 액체에서 기체로 갈수록 부피가 커진다. 주전자에서 수증기가 내뿜어져 나오는 것은 기화된 물이 그 부피를 감당하지 못 해서 그렇다. 그런데 물과 얼음은 이론과 다르다. 플라스틱 통에 물을 넣고 얼리면, 부피가 줄어들어야 하는데 반대로 통이 부풀어 오른다. 그건 물분자의 구조때문이다. 물분자는 ‘ㄱ’자로 구부러져 있는데, 얼음일 때는 그 특유의 모양으로 물일 때보다 빈공간이 더 생긴다. 완벽한 비유는 아니지만, 마치 종이컵 쌓기 놀이와 비슷하다. 종이컵으로 탑을 쌓으면 종이컵 안의 공간을 활용하지 못해 부피가 커진다. 이건 얼음이다. 그렇게 정성스럽게 쌓은 탑을 무너뜨리면, 종이컵이 이리저리 움직이다 포개어지거나 해서 여유 공간이 좀 더 생긴다. 이게 물인 셈이다. 그래서 물보다 얼음의 부피가 더 크다. 중학생 때 배운 것이 여전히 이렇게 머리에 남아있다.

수학도 중학생 때까지는 90점 이하로 내려가본 적이 없다. 문제는 고등학생 때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서 나는 비로소 한국 교육 시스템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애늙은이라 하지 마시라. 고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갑자기 수학 시험을 봤다. 다른 과목과 달리 반이 나누어진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수리 가형’ ‘수리 나형’이 따로 있어서 그런 것 같다. 물론 그건 변명에 불과했다. 수학에 자신이 있었던 나는 시험지를 받고 적잖이 당황했다. 생전 처음 보는 기호들이 있었다. 아마 행렬이었던 것 같은데, 타고난 천재가 아닌 이상 행렬은 배우지 않으면 절대 풀 수 없다. 그렇다. 형식적으로는 수학의 난이도가 다르니 반을 나눈다는 거였지만, 결국은 사교육에서 예습을 받았느냐 아니냐를 가르는 시험이었다. 당연히 나는 시험을 공쳤고, ‘하’반으로 들어갔다. 가치관이 형성되는 시기에 그런 낙인효과는 상당히 컸다. 나는 내가 수학을 못 하는 사람이라고 단정지었다. 그렇게 또 *수포자가 한명 탄생했다.
*수포자: 수학 공부를 포기한 사람.

그래도 다행히 과학에 대한 흥미는 잃지 않았다. 과학 공부는 늘 재밌었고, 학교 공부로는 만족하지 못해서 로봇 동아리에도 들어갔다. 그때 C언어를 처음 접했다. 정확히는 C언어 기반의 ‘로봇C’라는 언어였다.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을 곳이 없어서 주먹구구식으로 어깨 너머 배웠다. 그래서 남들을 따라 글자를 적어내리면서도 무슨 소리인지 당최 이해할 수 없었다. 학교에서 지원을 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몇몇 선생님들이 우리를 고깝게 봐서 그런 사치는 기대할 수 없었다.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대회 준비하러 동아리실에 가는 게 적잖이 아니꼬웠던 것 같다. 요즘 사람들은 이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학생이 어떤 방식으로든 학구열을 가지면 응원을 해줘야 마땅하니 말이다. 나는 그런 환경에서 자랐다. 실제로 몇 번은 동아리 활동을 제지 당하기도 했다. 학생은 자리에 앉아서 책만 봐야한다는 소수 선생들의 기대와 달리, 우리는 대회에서 입상했고, 그건 강력한 무기가 되어 당시 그 고등학교 수준을 기준으로 꽤 높은 대학교에 입학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나는 혼자 노는 걸 참 좋아했다. 그 중 단연 나의 사랑은 컴퓨터였다. 평일엔 하교하자마자 컴퓨터, 주말엔 눈 뜨자마자 컴퓨터, 컴퓨터, 컴퓨터를 줄곧했다. 대부분은 게임을 했다. 게임을 하다 질리면, 게임을 만들었다. 게임 제작이라 해봤자 ‘알피지 만들기 툴’을 통해서 캐릭터들을 배치시키고, 이벤트를 만들며 노는 거였다. 스타크래프트도 많이 했다. 경쟁하다 지는 건 싫어서 *유즈맵만 했다. 유즈맵을 하다보니 또 내가 직접 유즈맵을 만들고 싶어졌다. 블리자드에서 지원하는 맵에디터로 유닛들을 배치시키고, 트리거를 만들며 놀았다. 게임을 좋아하니 게임에 관련된 정보가 올라오는 사이트들을 잘 이용했다. 사이트도 내가 만들고 싶어졌다. 나모웹에디터, 혹은 네이버 카페 등을 이용해서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하여간 그런 식으로 나만의 세상을 구축하는 걸 좋아했다. 이런 활동들이 그닥 오래 간 것은 아니였지만, 누적되는 경험은 결코 사소하게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컴퓨터를 오래 사용하다 ‘개꿈닷넷’이라는 사이트를 접했다. 개발자 한 명이 악성코드 제거, 컴퓨터 최적화 등 무료 소프트웨어를 올리는 개인 사이트였다. 아무런 대가없이 타인을 도와주는 행위가 내게 잊지 못 할 인상을 남겼다. 난 프로그래머가 되고 싶었다.
*유즈맵: 게임에서 지원하는 엔진을 통해 사용자들이 임의로 만든, 일종의 게임 속 게임.

그렇게 컴퓨터공학과에 입학했다. 낯선 환경과 분위기, 특유의 낯가리는 성격 때문에 학기 초부터 난항을 겪었다. 소위 말하는 인싸들의 왁자지껄한 모습은 중학교 때의 엄석대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물론 그들과 엄석대는 근본적으로 달랐고, 개중에는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게 될 친구도 있었다. 트라우마는 종종 정상적인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난 그렇게 사람을 멀리했다. 그러다 동아리에 들어가게 됐는데, 큰 이유는 없었고, 대학 생활이 처음이라 중고등학생 때처럼 모든 학생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하는 건 줄 알았다. 지금 기억으로는 로봇 관련된 동아리는 없어서, 그나마 좋아했던 힙합 음악 동아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아무 의미 없는 행동으로 인해 내 인생이 또 한번 격정적인 파도를 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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