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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우주 여행기...🚀

표류

지구의 날씨는 예측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무리 좋은 컴퓨터도 자연을 완벽히 파악하지 못합니다. 날씨가 예상과 다르면 세워놓은 계획이 무너지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비하지 못한 날씨에 하늘을 원망하거나 일기예보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어두운 그림자가 하늘에 드리웁니다. 암막 커튼처럼 두꺼운 구름들이 햇빛을 덮습니다. 이내 비가 쏟아지고, 구름 사이로 번개가 치기 시작합니다. 위아래로 크게 흔들리는 파도 위에 커다란 화물선 하나가 떠있습니다. 화물선 몸통에는 희미하게 세이브(save)호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과 달리 배에 탄 이들을 구할 수 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항해사는 이렇게 갑작스러운 상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날씨도 사람들의 두려움을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바람이 거세지고 선체가 흔들립니다. 파도의 높이가 배의 키보다도 커집니다. 누군가는 기도를 하고 누군가는 포기한 채 눈을 감습니다.

평온해지길 원했던 사람들의 바람은 폭풍이라는 더 거센 바람에 뒤덮입니다. 세이브호가 크게 울렁거립니다.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에 닿을 만큼 높게 바다가 솟구칩니다. 자연은 인간의 생각보다 더 거대하고 더 잔혹합니다. 대처할 틈도 없이 파도가 내리칩니다. 돛대와 배의 곳곳이 부서집니다. 그 지옥 같은 순간이 몇 번이고 반복됩니다. 바다를 갈랐어야 할 화물선이 물먹은 종이 마냥 조각조각 찢어집니다.

아수라장이 된 것은 배에 타고 있던 짐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배의 조각들과 함께 항해하던 사람들도 바다에 잠깁니다. 그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날씨를 원망하고 있을까요? 아니면 일기예보를 비난하고 있을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그들을 배에 태운 사람들을 미워하고 있을까요? 그 물음은 파도와 함께 쓸려갑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고민할 때 종종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걱정거리들이 시나브로 무뎌진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매섭던 날씨도 화창하게 개이기 시작합니다. 해가 드리우니 이보다 평화로울 수는 없어 보입니다. 고요한 바다 위에 고통을 받던 세이브호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나무와 철로 만든 배보다 더 연약한 인간은 말할 것도 없겠죠.

맞습니다. 배에 탄 이들은 모두 죽었을 겁니다.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말이지요.

우주의 가능성은 그 어느 존재도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운 좋게도, 자그맣고 소중한 생명 하나가 목숨을 건졌습니다. 파도를 타고 표류한 소녀가 근처 이름 모를 섬에 다다릅니다. 하얀 백사장 위에 소녀가 가만히 잠들어 있습니다.

소녀가 바다로부터 살아남은 것은 다행이지만, 생존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소녀는 폭풍에 이어 자연에 또 한 번 노출됐습니다. 해안가 근처에 사는 야생동물은 물론이거니와, 파도에 쓸려오는 해파리와 가오리 같은 해양 생물들도 소녀에게 치명적입니다. 위험한 것은 동물의 공격만이 아닙니다. 물기를 가득 머금은 신체에 차가운 바닷바람은 소녀의 체온을 낮추기에 충분하겠지요. 이대로 계속 일어나지 못한다면, 동사하거나 심장마비에 걸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근처의 숲에서 어떤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이 땅에 먼저 살고 있던 주인들입니다. 그들은 소녀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소녀에게 접근합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소녀를 관찰합니다. 길쭉한 손가락과 팔다리, 곧은 척추와 이목구비를 보며 그들은 소녀가 자신들과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피부색만 빼고요. 비슷한 외모에 동질감을 느끼고, 무리에 도태된 소녀를 보며 연민을 느낍니다. 어떤 이들은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을 생각하기도 합니다.

소녀를 발견한 낯선 이들은 소녀를 내버려 둘지, 그들의 보금자리로 데려갈지를 고민합니다. 숨을 쉬고 있으니 죽은 것 같지는 않습니다. 키를 보아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성체도 아닙니다. 이대로 두면, 소녀는 분명 생을 마감할 것입니다. 짧은 토론 끝에 그들은 소녀를 데려가기로 결심합니다. 한 여성이 소녀를 안습니다. 그리고 하나둘 발을 떼기 시작합니다.

우거진 풀, 높게 솟은 나무, 형형색색의 과일들과 맹수. 숲, 이곳은 생태계가 격렬히 박동하는 지구의 심장입니다. 그들의 터는 그 자연 한가운데 위치해 있습니다. 열다섯에서 스물 정도 인원이 사는 작은 마을입니다. 마을에 도착한 이들 중 몇몇은 부드러운 이파리들을 모아 소녀가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듭니다. 능숙하게 침대가 만들어지고 소녀를 안고 있던 여성이 소녀를 조심히 내려놓습니다. 여린 피부를 가진 소녀가 추울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여분의 이파리로 소녀를 덮어줍니다.

마을에 남아 있던 사람들과 어린아이들이 모입니다.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소녀를 바라봅니다. 하지만 소녀가 다칠까 함부로 건드리는 이는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바라볼 뿐입니다.

소녀가 서서히 눈을 뜹니다. 소녀는 놀랍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소녀가 마주한 것은 기절하기 전과 전혀 다른 풍경에,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소녀의 눈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서립니다. 당황, 놀람, 두려움, 슬픔, 좌절, 여러 가지 감정 속에서 긍정적인 단어는 찾기 힘들어 보입니다.

당황한 것은 소녀를 구한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소녀가 얼마나 오래 여행을 했는지 모릅니다. 서로의 존재조차 알 수 없었던 이들은, 당연히 상대의 언어도, 문화도, 가치관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소녀를 안심시키고 싶지만, 쉽지가 않습니다.

서로 말없이 대치하던 중, 무리에서 남성 하나가 소녀에게 다가갑니다. 그에게 대화를 이끌어갈 방법이 있는 걸까요? 소녀는 경계합니다. 그의 얼굴을 주시하던 소녀의 시선은 그의 손으로 향합니다. 그가 커다란 손에 쥐고 있는 것은 붉게 익은 과일입니다. 아, 그는 현명했습니다. 욕구는 인종도, 종족도, 외모도, 그 어느 것도 구분하지 않습니다. 지구에 발을 디딘 모두가 평등하게 작용합니다. 단세포 동물이든, 다세포 동물이든, 심지어 가만히 뿌리내린 식물들도 저마다의 욕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어쩌면, 모든 물리법칙이 우주의 욕구일지도 모릅니다.

소녀는 배가 고픕니다.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그가 주는 과일을 받아들입니다. 소녀는 낯선 과일을 손에서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입으로 깨물어 보기도 합니다. 껍질은 소녀의 치아가 뚫기에 조금 두꺼워 보입니다. 남성이 손을 가만히 내밉니다. 소녀가 과일을 건네줍니다. 그는 단단하고 큰 이빨로 과일의 껍질을 벗깁니다. 껍질을 어느 정도 벗긴 뒤 과일을 반으로 가릅니다. 달콤한 향기가 소녀의 주변을 메웁니다. 껍질 안에 붉은빛의 작은 과육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습니다. 그는 손짓과 몸짓으로 먹는 시늉을 하고 소녀에게 과일을 쥐어줍니다.

소녀는 과일을 입에 댑니다. 새콤함과 달콤함이 소녀의 도파민을 자극합니다. 한 입 맛을 보고는 입맛에 맞는지 허겁지겁 먹기 시작합니다. 소녀는 지난 여정에 힘을 많이 쏟았습니다. 정신은 기절해 있었지만, 몸은 살기 위해 수많은 에너지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소녀가 과일을 먹는 것을 본 사람들은 다른 과일들도 가져와 소녀의 앞에 놓기 시작합니다. 배를 채운 소녀는 낯선 이들에게 공격 의사가 없다는 것을 인지합니다. 소녀가 여기가 어디인지, 여러분들은 누구인지 물어봅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알아듣는 사람은 없습니다. 몸짓으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해도 쉽지 않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소녀는 의연합니다. 울고 싶지만, 울지 않았습니다. 긴 잠에 빠지기 전의 장면들을 머릿속에 떠올립니다. 울부짖는 사람들,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 부서지는 배와 몰래 배를 버리고 대피하려는 항해사들까지, 아주 오래 전의 기억처럼 느껴집니다. 불과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인데 말이죠. 부모와 배에 타기 전부터 떨어져 가족에 대한 기억은 희미합니다. 기억을 되짚을수록 소녀의 가슴 한 구석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답답함이 응어리집니다.

그러던 중 따뜻한 손길이 등에 닿습니다. 행동으로 표출된 위로의 형태입니다. 언어는 통하지 않더라도 감정은 고스란히 전해집니다. 소녀는 포근한 감정을 느끼지만, 빛과 어둠이 항상 공존하듯 동시에, 공허한 감정도 느낍니다. 그러다 결국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내쏟습니다. 그걸 지켜보는 이들도 슬픔을 공유합니다. 소녀를 토닥이는 이들도 있고, 어쩔 줄 몰라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태양이 한걸음 움직이고 소녀는 진정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눈물 흘리기 망설이지만, 감정을 덜어내기에는 그보다 효과적일 수 없습니다. 숲의 상쾌한 바람이 소녀의 몸에 닿습니다. 바람으로 배가 뒤집히기도 하고, 바람으로 기분이 좋아지기도 합니다. 살아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 삶 자체가 곧 역설입니다.

소녀는 마을 주변을 둘러봅니다. 무성한 풀들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발견합니다. 소녀는 꽃 몇 송이를 꺾습니다. 자신을 보호해준 이들에게 보답하고 싶었나 봅니다. 소녀는 모르겠지만, 소녀가 꺾은 꽃은 목화꽃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목화꽃의 꽃말이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어쩌면 보호를 받은 소녀가 줄 수 있는 아주 적절한 선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녀가 꽃을 따고 있는 동안, 마을의 주민들은 불안해합니다. 수상한 낌새를 느낍니다. 오감으로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무언가의 형상이 떠오른 것입니다. 그러더니 멀리서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냄새가 다가옵니다. 땅이 미세하게 울리기 시작합니다. 마치 여럿이 뛰는 것 같은 진동입니다. 몇몇 이들은 이를 감지하고 불안해합니다. 마을의 우두머리는 흥분합니다. 그러다 귀를 찢는 파열음이 들립니다. 비명소리가 들립니다. 마침내 소리가 가까워지자 그 정체를 알게 됩니다.

비슷한 모습을 한 또 다른 존재입니다. 마을 주민보다는 소녀에 더 가까워 보입니다. 마을에 도착한 미지의 존재들은 모두 손에 무언가를 쥐고 있습니다. 손에 쥔 것은 나무로 반쯤 덮은 기다란 금속관입니다.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금속관에서 불꽃이 튀고 연기가 납니다. 강한 파열음이 들립니다. 손가락 한마디 크기의 구슬이 마을 사람들의 몸을 뚫습니다. 어떤 이들은 날카로운 쇠붙이가 달린 나무 막대기에 가슴을 찔립니다.

습격을 받은 주민들은 포효하고, 공격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큰 덩치와 강한 근력을 이용해 습격자들을 붙잡고 목덜미를 물어뜯습니다. 거대한 팔을 휘두르며 습격자들을 밀쳐내고, 던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지속되지 않습니다. 파괴적인 무기와 머릿수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마을에 터를 잡았던 모두가 피를 흘리며 쓰러집니다. 방금 전까지의 평화가 순식간에 사라집니다. 마을에는 더 이상 비명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상쾌한 바람도, 달콤한 과일향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시체와 화약냄새만이 적막을 채울 뿐입니다. 쓰러진 이들은 훗날 사람과에 고릴라속으로 분류되어 고릴라라고 불리게 됩니다.

습격자들은 나무를 베고 고릴라 시체의 가죽을 벗깁니다. 그러다가 겁에 질린 소녀를 발견합니다. 이곳에 어린 소녀가 있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가집니다. 짧은 대화를 나눈 뒤 습격자 중 하나가 검은 피부의 소녀를 거칠게 잡아끌고 어디론가 데려갑니다.

그가 소녀를 데려온 것은 해안가입니다. 해안에는 커다란 화물선이 하나 안착해 있습니다. 소녀가 며칠 전 타고 있던 화물선과 똑같은 모양입니다. 습격자들과 비슷한 용모와 옷차림을 한 이들이 소녀를 건네받습니다. 그들은 소녀를 화물칸에 집어넣고 문을 잠급니다. 소녀는 화물칸 안을 훑어봅니다. 그 안에는 소녀와 같은 피부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누워있습니다. 소녀는 체념하고 빈자리를 찾습니다. 그러다 누군가 소녀의 이름을 부릅니다. 소녀의 어머니입니다. 소녀는 어머니에게 뛰어가 품에 안기고 세상이 떠나갈 듯 울음을 터뜨립니다.

화물선 겉면은 새로 도장한 지 얼마 안 되어 보입니다. 슬레이브(slave)호라는 이름이 선명하게 쓰여 있습니다. 숲의 나무들이 하나 둘 쓰러지고, 또 누군가가 화물칸으로 잡혀 들어옵니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소녀는 화물선에 잡혀 들어왔으니 불행할까요? 아니면 어미를 찾았으니 행복할까요? 미래에 이 이야기가 대항해 시대로 쓰일까요? 아니면 대항의 시대로 쓰일까요? 사람다운 것이란 무엇일까요? 우주에 표류한 우리의 삶 자체가, 역설일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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